2008년 11월 22일
[퍼옴]교사와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들과 그에 따른 교사의 덕(virtue) - 부정변증법
교사와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들과 그에 따른 교사의 덕(virtue)
-당신은 좋은 교사인가?
전교조운동이 초심을 잃어간다는 비판이 쏟아질 무렵 “좋은 교사”라는타이틀을 건 단체가 발족해서 꽤 큰 반향을 일으킨 적 있다. 그 반향은 교육운동가를 자처하던 활동가들에게 먼저 좋은 교사가되어야 한다는 경종을 울리는 소리였다. 좋은 교사가 되지 못하는데 어떤 교육 실천이 운동성을 갖출 수 있겠는가하는 자성의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오고, 혹은 외부에서 강요되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게 풀릴 일은 아니다.
“좋은 교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수천년간 끊임없이 되물어진 그러나 아직도 무성한 논란만 나부끼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좋음, 즉 선(good)이 사용되는 경우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맥락이있다. 첫째는 어떤 역할, 과업, 직업, 혹은 신분에 걸맞는 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플라톤은 각 집단의 덕이 초월적으로결정되며 거기에 적합한 사람들의 소질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덕들은 폴리스의 관습과 전통에서 유래하며적합한 사람들의 소질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개발된다고 보았다. 헬레니즘-로마시대에는 선을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하기에는 사회가너무 크고 복잡해졌다. 따라서 선은 구체적인 직업이나 지위가 아니라 거대한 공동체의 시민 혹은 더 큰 인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갖추어야 하는 덕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시민이기를 혹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답적인선은 구체적인 삶에 지침과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의 세 번째 맥락이 등장하는데 이는 결과로 평가하는 덕이다. 좋은결과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즉 무엇을 하던 간에 의도한 바의 목적을 달성하면 선이 된다. 문제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것인데, 사회에 쾌락과 행복을 증가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 목적은 정당화된다.
이제 우리는 아주 단순한 “좋은 교사”라는 말을 치밀하게 곱씹어야 한다.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의 의미를 포함한다. 1) 교사라고 하는 특정한 직무, 과업에 적합한 덕을가지고 있다, 2)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지켜 마땅한 도리를 지키는 교사, 3) 교육이라는 활동을 통해 사회에 좋은 결과를가져오는 교사. 이 중 2)의 경우는 구태여 교사라는 말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선한 사람, 덕스러운 시민이라는 말과 사실상동의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교사라는 말을 교사라는 직무와 관련하여, 또 교육이라는 활동의 목적과 관련하여 고찰해야한다.
1. 교사란 어떤 직무인가? -교직관에 따른 교사의 덕
첫 번째 기준에 따르자면 좋은 교사는 교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능력과태도, 즉 덕을 가진 교사다. 그런데 플라톤 시대와 달리 우리는 시민은커녕 교사라는 단일 직종에 대해서조차 합의할수 있는 그런덕의 목록을 갖추기 어렵다. 그 이유는 교사라는 직종을 바라보는 관점이 통일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의 덕은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먼저 “어떤 교직관에 입각한 교사인가?”물음이 해결되어야 제기될 수 있다. 교직관에 따라 같은 속성이덕으로 칭송될 수도 악덕으로 비난받을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직관이 대단히 다양하여 분석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사람에 따라 다양하게도 단순하게도 분류하겠지만 대개는 노동자관, 성직관, 전문직관으로 정리된다는데 동의하는 추세다.
노동자관에 따른 교사의 덕
이 관점은 교사가 공공부문에서 교육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는것이다. 노동자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쓸 것인가 자체가 또 다른 논문 한편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재생산비용을 임금으로지급받고 사용자가 지정한 시간만큼 노동력을 지출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자. 이 관점에 서면 교사의 업무는 다른 직종과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단지 일정시간동안 노동력을 지출하는 활동들 중 한 양식일 뿐이다. 교사는 다만 교육이라는 노동 분업의한 파트를 맡아서 하고 있을 뿐이다. 교사가 다른 분야 노동자가 아니라 교사인 것이 특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따르면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한 교육기관은 필요하지 않다. 교사는 건전한 양식을 갖춘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 공장에서 금속노동자가 섬유노동자로 전환하기 위해 별다른 훈련 프로그램이 요구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크게다르지 않다. 특히 교사는 공공부문 노동자이기 때문에 여타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 행위기준은 상급자의 지시나 문서화된 규정이고, 바람직한 교직문화는 규정과 규칙을 꼼꼼히 완수하고, 상급자 지시에 복종하며 맡은 일을분명히 하는 풍토에 도움이 되는 태도와 양식이다. 칼출근, 칼퇴근, 공문대로의 업무수행, 시간 엄수와 정량 등이다. 교사에 대한도덕적 판단은 규정·상급자 지시 위반여부에 따라 정당화 혹은 비난된다. 이 관점은 교원노조의 정책에도 영향을 주어 주로 교사에대한 처우, 복리 등을 주된 목적으로 삼으며 학교, 정부, 지역사회를 철저히 고용주로 간주한다.
성직관에 따른 교사의 덕
이 관점은 교사가 사회의 도덕 공동체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다고보는 관점이다. 뒤르켐의 “세속적 성직자”라는 용어에서 이 관점은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자본주의의 보편화와 전통사회의해체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주를 야기하였고, 자연히 이들의 자녀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이들의 이른바 도덕적 타락은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애덤 스미스도 이 도덕적 타락의 해법으로 공교육을 제시하였다.특히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신세대의 도덕적 성장과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보장하기 위한 대중적인 공교육제도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교사는 바로 이러한 고귀한 일을 담당하는 성직으로 대두되었다.교원양성을 위한 특별한 교육기관이 체계화된 것은 바로 이런 성직관으로서 교직관이 보편화되면서 부터다. 교사는 이런 중요한 직책을담당하기 때문에 그 양성과정부터 고도의 도덕성과 소명감을 갖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이 입장에 서면 교사는 교사의 덕은 노동자관에서와 판이하다. 교사의 덕은다른 무엇보다 학생들에 대한 사랑, 혹은 공동체에의 헌신 등이 된다. 또 언제든지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고도의 도덕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사회의 규정이나 상급자의 지시는 중요하지 않다. 교사는 오직 빛나는 공동체의 전통,양심, 도덕적 호소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비난될 뿐이다.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라는 말 속에 이 관점의 핵심이 나타나고있다. 이 관점에 서면 교원노조 역시 터무니 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교사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봉사단체가 필요하다.
전문직관
교사가 이론적 기반과 실제적 방법(기술)을 보유한 전문가라는 관점이다. 이관점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오래된 교직관이다. 실제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학자들은 교사이기도 했다. 이들이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대중교육이 확대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 즉 Professor와 Teacher가 분리된 것이다. 이때프로페서는 결코 대학의 교수만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한 동안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사는 teacher로 중등학교 이상의 교사는professor로 불리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 대학교수 외에는 모두 티쳐가 되었지만 그러나 프로페서의 의미는 여전히잔존하여 성직관과 상호간섭된 채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초등은 성직관이 중등은 전문직관이 더 큰 영향을주었지만 교육학과 심리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초등학교 교사에게도 전문직관의 영향이 확대되었다.
전문직관에 입각하면 교사는 나름의 철학적·이론적 입장에 따라 교육 목적을수립해야 하며, 그 달성에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상급자 지시보다는 철학적, 과학적 옳음이 더중요하며, 각종 규정들도 여러 이론적 입장을 가진 교육자들이 토론하고 갱신해야 하는 대상이다. 즉 교사의 가장 중요한 덕은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지식과 양식이다. 교사에 대한 정당화와 비난 역시 어떤 이론적, 방법론적 근거에 대한 것이라야 한다. 이관점에 서면 특수한 교원양성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은 성직관과 동일하지만, 그 기관에서 행해지는 교육과 훈련의 내용은 상당히달라진다. 교원노조의 설립이 정당화 된다는 점에서는 노동자관과 같지만, 교원노조의 성격 역시 임금, 근로조건보다는 교사의 전문적판단과 작업의 권리를 부당한 간섭등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지금까지 세가지 교직관을 살펴보고 그것에 따른 교사의 덕을 살펴보았다.그런데 이 교직관들은 일종의 이념형으로 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교직관은 이 세 가지로 날카롭게 분류되지 않고 서로 뒤섞이기때문이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둘보다 분명 더 강조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교사가 혹은 어떤 학교가 노동직, 성직, 전문직중 어떤 교직관을 강조하고 있는지 판단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셋 중 어떤 교직관이 더 우월한지 가리는 가치 평가적 진술은불가능하다. 그것은 교사가 일하고 있는 학교가 그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회변동이거의 없고, 노동분업도 단순한 사회에서 교사의 역할과 수시로 변동하고 복잡한 지식체계를 다루어야 하는 사회에서의 교사의 역할이같을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교사가 가지고 있는 교직관, 어떤 학교의 교직문화를 그 자체로 비판할 수 없다. 그 비판은해당사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 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교직관도 달라지며, 당연히 교사의 덕도, 즉 좋은 교사의기준도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교사는 어떤 교육적 행위를 수행했을 때 그것을 스스로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일련의 활동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사의 활동은, 그리고 어떤 학교의 일반적인 활동 양식과태도는 1) 상급자의 지시나 규정, 2)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나 학생에 대한 사랑, 3) 전문적 이론과 과학적 방법론 이 셋 중하나에 의해 정당화가 가능해야 한다.
행위나 활동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거나 앞에서 제시한 셋 중 어디로도환원되지 않는 엉뚱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교사나 학교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예컨대 교사나 학교의 활동기준이 조변석개하여 일관성을찾아볼 수 없거나, 교사 혹은 교장의 변덕에 의존하는 경우, 또 “금전적 이익”, “출세와 승진” 등 엉뚱한 기준에 의해 활동을선택하는 경우가 여기 해당된다.
2.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교육관에 따른 교사의 덕
이제 좋은 교사의 기준을 목적론적으로 접근해 보자. 이 경우 좋은 교사는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교사, 즉 교육의 목적을 잘 달성한 교사가 된다. 이는 결국 “교육이 무엇이며, 무엇이라야 하는가?”의문제, 즉 교육관에 대한 물음을 요청한다. 교육관이 다르면 교육의 목적도 다르며 당연히 좋은 결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실제교육철학의 숱한 논쟁은 항상 교육관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무리한 단순화를 감수하고 지금까지의 다양한 교육철학논쟁들을 망라하여 교육관들을 분류해보고 그것에 따른 좋은 교사의 기준을 찾아보도록 하자.
모든 교육철학에 공통된 교육의 요소는 신세대에게 1) 의도적인 변화를일으킨다는 것이며, 2) 그 변화가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논쟁은 ㄱ)그 변화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ㄴ)“가치있는”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ㄱ)과 관련해서는 변화의 동력이 아동 외부에 있다는 관점과 내부에 있다는 관점으로나뉜다. ㄴ)과 관련해서는 그 기준이 이미 정해져있는가 아니면 교육 사태에서 형성해 나가는가 하는 관점으로 나뉜다. 이러한관점들을 조합하게 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교육관들을 정리할 수 있다.
전통주의 교육관: 사회화로서 교육
전통주의 교육관은 공동체의 문화유산과 규범을 전수함으로써 신세대를 사회의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교육관에서 “가치있는 것”은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규범이다. 이들이전수할 가치가 있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수세대에 걸쳐 전수되어왔기 때문이며,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규범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또한 이 관점에서 변화의 원인은 아동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다.이를 듀이는 주조주의 교육관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사회, 공동체는 아동의 탄생 이전부터 있어왔고, 아동은 이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교육받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아동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 있다. 따라서 교육내용은 가능하면원형 그대로 전수되어야 하며, 교사는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수할 것인가 고민해야지 그 내용까지 고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수많은 교육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비판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오래된,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관이다. 이 교육관에서 좋은 교사는 전수대상이 되는 문화유산과 도덕규범을 많이 알고있으면서 이를 성실하게 전수하는 일종의 노동자 혹은 공무원이 될 수 밖에 없다. 만약 학생들이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이함양된다면 이 교육관에서 결코 교육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 어렵다.
진보주의 교육관: 성장으로서 교육
이 교육관은 교육의 목적을 공동체, 사회에 두지 않고 아동의 성장에 둔다.이미 에라스무스가 이러한 교육관을 제기하였고, 루소의 『에밀』은 이 교육관의 정전이 되었다. 20세기 들어 장 피아제는 이흐름의 또 다른 대변자가 되었다. 여기 따르면 모든 아동은 각자가 타고난 성향과 소질에 따라 성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교사는 이러한 자발적인 성장이 방해받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적절히 이끌어주는 안내자다. 또한 교육할만한 가치있는 것들은 아동내부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아동의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아동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 즉 성장의 과정이며,교육의 대상이 되는 가치있는 것들도 고정된 지식이나 문화 혹은 규범이 아니다. 이 교육관에서 좋은 결과는 아동의 자발성의 함양에있지 어떤 고정된 지식이나 규범의 전달여부에 있지 않다. 좋은 교사의 기준 역시 그가 발달심리학, 아동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가운데 그들의 자발성을 잘 이끌어내는가에 있지 교과에 대한 지식, 혹은 규범의 준수 등에 있지 않다.
탐구주의 교육관: 지식과 문화의 구성
이 교육관은 필자가 분류한 범주로 듀이, 피터즈, 비고츠키, 프레이리가망라된다. 이들은 전통주의와 진보주의가 모두 교육목표를 이미 정해지고 고정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단지 그 소재지만 교사 혹은학생에게 부여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교육의 목표는 교사에 있는 것도, 학생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사이에 존재하며,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사회적 상황을 인식하는 속에서 지식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으로 본다. 다만 듀이와프레이리는 그러한 과정이야말로 사회를 개선하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보는 반면(교육→사회), 피터즈와 비고츠키는 사회적 상황이그러한 과정을 구성하는 기준을 제공할 것(사회→교육)이라고 보는 점에서 다르다.
다만 이들의 이론적 입장에 따라 좋은 결과의 기준은 달라진다. 피터즈와비고츠키의 관점에 서면 좋은 결과는 그 사회의 문화와 규범을 상호작용을 통해 자발적으로 내면화할 수 있는 아동이다. 듀이와프레이리를 따르게 되면 좋은 결과는 자신들의 상황에서 출발하여 사회의 문화와 규범을 이해할 뿐 아니라 이것을 능동적으로개선하려는 아동이다. 좋은 교사의 기준도 역시 여기에서 도출된다.
인적자본주의 교육관
이 교육관에 입각하면 교육은 사회의 생산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노동력을양성하는 것이다. 혹은 개인적 차원으로 교육은 학생의 직업 활동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입시교육은 인적자본주의의 기괴한 왜곡이다.학생들의 경제적 직업적 성공, 그리고 보다 넓게는 GDP의 성장, 기업 이윤의 확대가 좋은 결과가 된다. 이 교육관에 적합한교사는 주어진 과제를 학생들이 틀림없이 이수하고 기능을 습득하도록 해야 하는 단순한 조작자이며 기능인이다.
행동주의 교육관
이 교육관은 교육을 교사가 학생에게 의도적인 작용(조작)을 가하여 일련의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본다. 이 교육관은 교육을 철저히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작용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타일러의 말대로교육목표를 “철학에게 위임”해버렸다. 교사는 목표 이후부터 시작한다. 교사는 그 목표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그것을 달성하기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또 학생들의 상태까지 분석하여 이를 적용하고 피드백한다. 이 교육관에적합한 교사는 방법들에 숙달되고 과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전문직관, 목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보유하지 않는다는점에서는 노동직관인 모순적 교사다. 즉 Profession이 아니라 Expert로서 전문가다.
3. 결론을 대신하여
이 글의 목적은 특정 교직관이나 교육관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교사가 자신의 활동이나 행위가 어떤 근거에 의해 선택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분석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직은 중요한 자리이며,교사는 그 자리에 선택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어떤 관점에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행위나 활동을선택하였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관점에 서게 된 이유도 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정당화는 교사가 서 있는 자리, 즉 사회적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특정 교직관 혹은 교육관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지않는다. 대표적인 진보교육학자 듀이조차 자신의 교육관이 사회가 그런 교육을 요구하기 때문에 정당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특정한 교직관과 교육관을 비판적으로검토하고, 자신의 교육활동을 이러한 교직관과 교육관에 비추어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은 당연히 과업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삶의양식에서 습득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학생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동료들과 문제의식을 교환하는삶의 양식에서만 얻어진다.
나는 교사가 전문직이 되는 것이, 진보적인 교육철학을 가지는 것이 무조건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교사는 경우에 따라 노동자처럼 혹은 공무원처럼 일할 수도 있다. 가장 보수적인 교육관을 가질수도 있다.그러나 자신이 왜 노동자처럼, 공무원처럼 일해야 하는지, 자신이 왜 보수적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납득하고 정당화한상태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헨리 지루가 말한 지식인으로서 교사는 바로 이런 의미이며, 편협한 전문가가 아니라 철학을 갖춘전문직으로서의 교사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말이다.
# by | 2008/11/22 14:05 | 교육문제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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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치열한 고민 잘 느껴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리 잘 헤쳐나가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냥 여기에 배설(?) 할 뿐이죠 ㅠㅠ.
음, 미니마모랄리아는 아도르노가 체계적으로 쓴게 아니라 그때 그때 떠오른 생각을 비망록처럼 쓴 책이라 절대 입문서가 될수는 없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을 모습이 눈에 훤합니다^^ 비판이론 그 자체를 가장 잘 정리한 책은 제가 라이프로그에 새로 올려 놓은 '하버마스와 현대사회' '이성의 힘' 이 두책입니다. 이 중 '이성의 힘'이 더 얇고 부담이 적지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에만 집중한 경향이 있고, 하버마스와 현대사회는 비판이론 전반에 대한 요약을 잘 하고 있습니다. 둘 다 좋은 책입니다.
특히 하버마스는 교육에 주는 시사점이 많은 사상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결합시킨게 역시 라이프로그에 링크되어 있는 '하버마스,비판이론,교육'입니다. 이성의 힘을 먼저 보시거나 같이 보면서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고통스럽고 답답해 진다는 것은 미리 각오(?) 하셔야 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