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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과 성내운

살던 때...


 이오덕은 1925년 11월 14일 태어났고, 성내운은 1926년 3월 29일 태어났다. 우리 역사에서 잊지 못할 치욕스런 시절이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가장 큰 비극이었던 6·25 사변을 겪었고, 군사독재 정권에 억눌리면서도 올바른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위해 온 삶을 다 살았다. 몸소 보여 준 두 사람의 삶은 4·19 뒤에 생긴 교원 노조가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당한 뒤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였던 이 땅의 교사들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벌떡 일어나 참교육의 함성을 올리고, 교육 민주화의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었다.



이오덕과 성내운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함께 교육자의 길을 걸었지만 교육에 들어서는 동기나 활동 과정은 다르다. 이오덕은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다니면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러 농촌 마을에 다니기가 괴로워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나무둥치에 앉아 있다가 교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풍금 소리와 아이들 노래 소리,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사 시험을 보고 1944년 교사가 된다. 그러나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학교 교사도 군청 직원이나 마찬가지, 아니 어찌 보면 그보다 더한 일제 식민지 개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게 교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괴로워한다. 그러다 해방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과 동족상잔의 비극에 내몰리게 된다. 결국 황급히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가서 복직을 하지만 올바른 교사의 길을 걷기는 어려웠다. 가난한 아이들이 학교 낼 돈을 내지 않는다고 쫓아내는 교사, 아이들한테 각종 잡부금을 잘 걷어 내는 교사, 아이들을 때려 가면서 입시를 위해 암기 교육만 잘하는 교사, 승진을 위해 아부 잘하는 교사가 유능한 교사로 대접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오덕은 이런 도시 학교 교육의 병폐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어 남들은 가기 싫다는 농촌으로, 더 깊은 산골로 찾아가 가난한 아이들과 살았다. 고도성장과 물질 만능주의로 치닫던 시기에 이렇게 가난하고 억눌린 아이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치고, 그 아이들한테 배우면서 만들어 낸 교육이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고, 그 열매를 엮은 책이 《일하는 아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아이들 글 모음이다. 1979년 가난한 농촌과 산촌 아이들이 쓴 시를 엮은 《일하는 아이들》이 나왔을 때 시인과 교사들이 받은 느낌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성내운은 식민지 수재들이 계층 향상의 첫 단계를 밟기 위해 모인다는 경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 양심 있는 일본인 교사가 집으로 불러서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면 일제의 사냥개가 되는 것이니 자퇴를 하고, 조선을 위한 일을 하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자퇴 자체가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 - 편집자 주)으로 찍히는 것이라 쉽게 자퇴를 못하고 몰래 우리 역사와 문화와 영어를 공부한다. 그러다 해방을 맞이하게 되어 서울사대로 진학을 하였고, 24세에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그이는 초기에 미국에 가서 미국 교육을 시찰한 사람이었고, 돌아와 ‘새교육’을 추진하는 핵심에 있었다. 35세에는 문교부 수석 장학관이 되었는데, 5·16 군사 정권에 동조할 수 없어 교육 관료직을 떠나 연세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성내운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교수와 학생들 석방을 위한 ‘교수 기도회’를 주동하였다가 1976년 해직되었다.



이오덕과 성내운이 만난 것은 성내운이 ‘교육지표’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이오덕이 쓴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를 읽고, 긴 편지를 쓰면서부터다. 그렇게 만나 1980년대 교육 민주화와 참교육의 길에 두 횃불로 타 올랐던 것이다.


 


이오덕(1925.11.14.~2003. 8. 25.)




이오덕은 1925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청송군 화목면 덕계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고향은 그 곳에서 100여 리 떨어진 성주군인데, 아버지가 기독교를 믿으면서 산골로 옮겨 화목교회를 세우고, 경북 북부지역 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오덕이라는 이름은 태어난 해인 1925년의 5 자와 덕계리의 덕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첫아들을, 항렬이나 한자 뜻을 살펴서 작명하는 유교 풍습이나 가문의 족보 문화에 따르지 않고 아이 태어난 때와 곳에서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이오덕



 


당시 기독교를 전도할 때 먼저 교회를 세우고, 그 다음이 학교를 세웠다. 이오덕의 아버지도 교인들과 힘을 모아 화목교회를 먼저 세우고, 교회 안에 주일 학교를 세우고, 화목초등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또 농사를 지으면서 사랑방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쳤다고도 한다. 이오덕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책을 읽는 소리가 좋았다고 한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많은 동요를 배우고 동화를 들었는데, 교회에서 배운 그 동요와 동화가 우리말과 정신을 보전해 가도록 한, 참으로 고마운 곳이었다고 한다. 학교에 가서는 일본 군가나 의식 노래, 곧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교회에서는 〈고향의 봄〉이나 〈반달〉같은 동요를 수백 가지나 배웠다. 그 노래들은 방정환을 비롯한 어린이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만들어서 가르치던 노래들이다.



1944년, 천직이라고 생각해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교사가 되고 보니 겉에서 보던 것과 달리 아이들을 억압하는 교육, 무엇보다도 군대식으로 훈련시키는 식민지 노예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을 괴로워하다 해방을 맞이한다.



이오덕은 1982년에 쓴 ‘죄인의 말’이라는 글에서 당시 1년 남짓한 동안에 ‘나는 우리 민족의 아이들을 일본 제국의 아이들로 훈련하는 일에 충실히 협력했던 것이다’고 하면서, “해방이 되어 잠시 꿈 같은 날을 보냈지만, 일제의 망령은 모든 학교 교육에서 조금씩 되살아났다. 아동 중심이니, 민주 교육이니 하는 것은 입으로만 지껄이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한층 악화시킨 것이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온갖 금품 징수 사무였다. (줄임) 이런 짓을 용납하며 감행해 온 사람이 교육자는 무슨 교육자란 말인가? 그 당시 교육계에서 모범 교육자가 되는 조건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돈을 잘 걷어 내는 일이고, 둘째는 청소를 깨끗이 하는 일이고, 셋째는 환경 정리를 잘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에서 무사히 월급장이 노릇을 하여 왔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면서 자신의 죄를 질책하였다. 그 시대 교사로 살았다는 것 자체가 민족에 대한 죄인, 어린이에 대한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시대를 끝까지 올곧게 살기 위해 애쓴 그 아픔이 마음으로 느껴지고, 앞으로 50년 뒤에 지금 이 시대를 교사로 살았던 내가 역사의 죄인이었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오덕은 같은 글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자 돈 걷는 일만은 천만다행히도 거의 없어졌지만, 교육이 하나의 상품으로 되고 말았다. 빈 내용을 겉치레로 선전하기에 학교마다 경쟁이 되었고, 아이들은 서로 점수를 많이 따려고 하는 비참한 경쟁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교육행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교육을 그 세부 실천에 이르기까지 간섭함으로써, 학교 교육은 온전히 자주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어느 학교 없이 교육 목표는 세우지만 장학 방침을 구현하여 그 실적을 숫자로 보고해야 하므로, 교육 목표는 형식에 그치거나 그 목표조차 장학 방침을 열거하는 꼴이 되어, 천편일률의 교육이 강행되었다. 교사들은 다만 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이행하는 기계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또한 교사의 지시 명령에만 움직이는 기계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며, 껍데기 겉치레로 교육을 치장하는 거짓 교육을 비판한다.



이런 거짓 교육을 비판하면서 교사들이 참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참교육의 길을 스스로 현장에서 연구하고 실천하였고, 그 실천 모습과 결과를 우리들 앞에 내놓았다. 바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다. 흔히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국어과 ‘쓰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교육 방법은 ‘쓰기’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그 기본 정신과 목적은 어린이 해방 교육, 민주·민족·인간화 교육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지행해야 할 참 교육이다. 실제로 ‘참교육’이라는 말도 ‘글쓰기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오덕이 만들어 널리 알린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참교육’을 누가 어떤 의미로 규정하든 우리 교육의 역사 속에서 ‘참교육’이 나타나게 된 맥락과 그 참 뜻을 이해하려면 이오덕의 교육 사상과 방법, 그리고 실천 과정과 성과를 먼저 살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오덕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이 심해서 학교 밖으로 나가기도 점점 어려워지는데, 한편 어린이문학과 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살아난다. 점점 심해지는 교육청과 경찰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1986년 교직을 떠나 서울에서 가까운 과천으로 이사를 온다. 대전 집으로 가지 않고 과천으로 온 까닭은 서울에서 가까이 있어야 여러 활동에 참여하기 쉽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과천으로 이사 오면서 여러 가지 일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어린이도서연구회,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민주교육추진 전국초등교사협의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같은 일에 참여한다. 그러나 과천에서 살던 시기, 1986년부터 1999년까지 했던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우리글 바로쓰기 운동’이다.



우리글 바로쓰기 운동은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한글 운동의 발전이다. 그동안 한글 전용운동은 한자를 한글로 쓰기 운동이 중심과제였다. 그런데 이오덕이 주장한 우리글 바로쓰기는 한글로 쓰기는 하지만 유식한 사람들이나 아는 중국 말이나 유럽 말이나 일본 말로 쓰지 말고 누구나 알고 있는 말, 누구한테나 쉬운 우리 말로 쓰자는 운동이다.



둘째는 말과 글의 민주화다. 여기서 ‘누구나’는 무식한 사람, 곧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아직 덜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인가? 사회 계층으로는 도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일하는 사람들’이고, 나이로는 어린이다. 유식한 사람들은 자기 유식만 뽐내지 말고 이런 사람들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써야 하고, 또 이 사람들도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자유롭게 글로 쓸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말과 글로 지식인과 비지식인,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을 구별할 수 있던 사회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곧 지배 계층이 어려운 말과 글로 피지배 계층을 속이고 착취하던 시대를 벗어나 민주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말과 글에서 민주화가 이뤄져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문체 혁명이다. 사회가 바뀌면 그에 맞게 문체가 바뀐다. 문체가 바뀌면 그에 맞게 사회가 바뀐다. 이는 서로 변화에 영향을 주는 관계에 놓여 있다. 이오덕이 이태준의 문체론을 비판하면서 제안한 새로운 문체론은 우리 겨레가 지향하는 민주화와 민족공동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문체 혁명이다.



성내운(1926. 3. 29.~1989.12. 24.)




성내운은 1926년 3월 29일 충청남도 공주군 신풍면 산정리에서 아버지 성의강과 어머니 이복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농사꾼 집안이지만 홍수로 일부 논밭을 잃은 뒤에는 어머니가 떡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가난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다. 성내운 부모는 가난 때문에 1934년 고향을 떠나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사했다가 1936년에 다시 충청남도 대전으로 이사를 한다.



△ 1987년 참교육의 길을 역설하며 해직교사들을 격려하는 성내운. ⓒ 박용수

 

성내운은 보통학교를 다닐 때 처음에는 공부를 잘 못했으나 조금씩 나아져 나중에는 우등으로 졸업했고, 1939년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는 장학생으로 뽑혔다. 그런데 일제가 식민지 노예교육의 중심기관으로 세운 경성사범에서 성내운은 오히려 민족 현실에 눈을 뜨게 되는데, 1940년 일본인 담임교사에게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라는 가르침을 몰래 받은 다음부터다. 그때부터 성내운은 우리말로 된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남몰래 찾아 읽는 한편,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한다. 이때 경험으로 성내운은 학교 교육을 비판하면서도 ‘권력의 도구이기를 거부하고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도 있다고 하면서 정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하곤 하였다.



1946년 서울사범대에 편입하였는데, 1948년 몇 개월에 걸쳐 우리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미국 교육자들이 와서 강의할 때 초등학교 언어 교육법과 사회과 교육법 강의를 학생이면서 통역한다. 영어를 잘했기 때문이다. 성내운은 이때부터 이미 영어에 뛰어난 수재로 이름을 떨쳤지만 글을 쓸 때는 한글로 쓰고, 대화를 할 때도 외국어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섞어 쓰지 않았다.



스물네 살 때인 1949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 강의를 시작했고, 1950년에는 《새교육개론》을 써서 서울 홍지사에서 발간하였다. 1953년부터 중앙교육연구소에서 일했고, 1954년에는 미국 교육을 시찰한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출범한 제2공화국 문교부 수석장학관으로 일한다. 이런 그이의 경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내운은 ‘새교육’의 핵심에 서 있었음을 의미하고, 다른 동료들처럼 제3공화국에 협력했다면 얼마든지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내운은 1963년, 모든 국민을 사병처럼 훈련시켜서 순종형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제3공화국 교육정책에 반대하면서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반역(?)의 길로 들어선다. 그 외로움과 두려움이 결코 적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용기를 내는 일 또한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회 전문위원직을 사퇴한 성내운은 1963년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를 맡았고, 1964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재활원 부속 초등학교 교장 일을 맡는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지체 장애아들을 교육하는 일인데, 성내운은 이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세 학교의 이야기》(학민사, 1983)에 기록한 당시 교육을 보면 민주교육과 인간교육에 대한 성내운의 믿음과 실천력을 오롯이 볼 수 있다.



1976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해 해직 교수가 되는데,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과 교수들 석방을 위한 기도회와 정부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1977년 해직교수협의회 회장과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을 맡아 일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 앞장서기 시작한다.



성내운이 우리 겨레의 역사, 우리 교육사에 전환점을 마련하는 큰일을 하는데, 바로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이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다.



‘우리의 교육지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1968년 12월 5일 공포한 ‘국민교육헌장’을 기조로 한 교육정책에 대한 반대다. 국민교육헌장은 철학자 박종홍이 기초 위원으로 참여해 만들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우위’로 요약되는 이 헌장은 일왕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고 일왕에 대한 절대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일제의 ‘교육칙어’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1993년 교과서와 정부 공식 행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군사독재 정권의 추악함을 상징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1975년 3월 1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이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고, 압제와 불의를 거부하는 민주 국민이다”로 시작하는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의 교육지표’가 우리 교육사에서 중요한 까닭은 이 선언이 현재 전교조를 비롯한 교육 민주화 운동의 씨앗이며, 그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 는 선언은 당시 유신 독재의 시녀 노릇에 취해 있던 교사들의 양심을 두들겨 깨웠고, 우리 교육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전남대 교수 11명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지만 이 선언을 주도하고 전문을 쓴 사람은 성내운이다. 처음에는 전국 교수들이 50명에서 100명 정도가 참여하면 발표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되자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그냥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성내운이 서울에서 덜컥 발표한 다음에 광주로 내려가서, 송기숙 교수에게 발표했으니 감옥에 갈 준비를 하라고 알렸다고 한다. 다행히 서명했던 교수들이 끝까지 의연하게 참여했고, 군사독재 정권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교육지표 선언을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고 하면서 서명한 대학 교수 11명을 즉각 해직시키고, 앞장선 송기숙과 성내운을 구속하였다. 광주교도소 독방에 갇힌 성내운은 시 낭송과 독서를 하면서 지냈는데, 옆방에서 송기숙과 통방을 해 주던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만나게 되었고, 감옥에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를 읽고 이오덕을 만나게 된다. 박흥숙은 독재 정권이 민중의 아들을 어떻게 살인자로 만들었는지를 보여 주었고, 이오덕은 ‘새교육’이 아이들을 어떻게 죽이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성내운은 이오덕이 보여 주는 아이들의 현실에 대해 ‘제 자식이 그리 된 것처럼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고 말한다.



1979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지만, 11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공동선언을 주도해서 계엄 정부에 수배당했다가 1980년 ‘서울의 봄’ 때 사면되어 1980년 3월 연세대학교에 복직한다. 그러나 7월에 다시 해직된다. 해직 교수 성내운은 1982년 《인간회복의 교육》을 쓰고, 1983년 미국에 가서 3개월 동안 교포들을 대상으로 시를 낭송하면서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돌아와서는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맡고, 1984년에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고문을 맡았다.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이 나자 재판에 변호인단으로 출석하여 민중교육지에 실린 교육 문제에 대한 글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강력히 증언한다. 1986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았고, 〈교육과 실천〉 발행인이 되었다. 그리고 교육 민주화 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일과 가야할 자리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쫓아다니면서 시를 낭송하면서 힘겹게 싸우는 교사들한테 힘을 주었다. 


 


 이오덕과 성내운이 후세에 끼친 영향


 


이오덕은 어린이 교육과 어린이문학에 관한 책 80여 권을 쓰는 일을 하면서도 어린이 교육 운동과 어린이문학 활동을 위한 여러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오덕이 참여한 단체를 보면 이원수가 이끌던 어린이문학 단체, 민주교육추진 전국초등교육협의회를 비롯한 교육단체, 우리말과 글 바로쓰기를 하는 단체들이다. 현재 이오덕의 뜻을 바탕으로 삼아 활동하는 주요 단체로는 ‘어린이도서연구회’,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우리말을 살리는 겨레모임’, ‘마주이야기 교육 연구 모임’을 손꼽을 수 있겠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1980년 서울양서협동조합 산하단체로 결성한 모임으로 우리 겨레 어린이들이 읽어야 할 좋은 책을 선정하고, 어린이 독서 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오덕은 결성 초기부터 강연과 회보에 글을 써 주는 것을 비롯해 많은 지도와 자문을 해 주었고, 1997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창립 이사를 맡아 주었고, 그이의 어린이 문학 사상이 담긴 《시정신과 유희정신》과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은 어린이도서연구회 회원들이 읽는 기본 도서였던 것이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는 이원수 문학관을 지키고 따르던 어린이문학 단체가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1990년에 직접 앞장 서 만든 단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아동 분과와 겹치는 회원들이 많았는데, 이는 초대 회장인 이오덕이 작가회의 아동 분과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는 ‘이원수 문학의 밤’을 열기도 하면서 방정환과 이원수 문학의 맥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였고, 월간 〈어린이 문학〉을 펴내면서 어린이문학 발전에 큰 힘을 주기도 했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은 1998년에 이대로, 김경희, 김수업 선생님들과 같이 만든 모임이다. 이오덕은 과천으로 이사 오면서 우리글 바로쓰기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1989년 《우리글 바로쓰기》를 펴내면서 그 뜻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초부터 ‘우리말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말 살리는 모임’을 하다가 1995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와 합해서 ‘한국글쓰기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처음 생각과 달리 ‘한국글쓰기연구회’에서 우리글 바로쓰기와 우리말 살리는 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아 1998년 다시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을 만들면서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하였다. 지금 이 모임은 〈우리말 우리얼〉이라는 회보를 내면서 꾸준히 그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는 이오덕이 가장 사랑하고, 큰 힘을 기울였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임은 1983년에 이오덕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따르는 초중고 대학 선생들이 모여서 만들었고, 1995년 그 이름을 ‘한국글쓰기연구회’로 바꾸었다가 2004년 다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로 바꾸어 현재 회원 8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 모임은 1980년대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주장하면서 참교육 실천에 앞장서 우리 교육 현장과 사회에 큰 영향을 준 단체다. 1989년 전교조 결성 당시 ‘참교육’이라는 한마디 말이 교육계와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말로, 나아가 우리 교육이 가야 할 지향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는 힘은 당시 교육 현장에서 일궈내며 실천한 글쓰기 교육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들이 민주교육추진 전교협과 그 뒤를 잇는 전교조 결성 과정에 적극 참여했는데, 전교조 결성 직후 15개 시도지부 가운데 10개 시도지부 지부장이 글쓰기 회원 출신들이었다. 몇 개 지부는 초기 조합원 대다수가 글쓰기 회원이기도 했다. 또 전교조 결성 당시에 만일 참교육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전교조 운동이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참교육이라는 말이 당시 조합원들에게 얼마나 분명하고 벅찬 희망을 주는 말이었는지, 일반 학부모와 대중은 물론 탄압의 선봉에 선 교육 관료와 경찰까지 설득할 수 있는 분명한 말이었는지를 되돌아보면 우리 전교조가 이오덕에게 진 빚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은 ‘참교육’을 잘 하는 것이다.



성내운은 교육 관련 저서와 번역서 30여 권을 냈다. 그 가운데서 골라 쓰고 싶은 말과, ‘민주교육과 인권’, ‘사람답게 자라나는 길’ ‘지금의 이 어린이들을 참 한국인이 되게 하는 길’ 같은 글에서 뽑고 싶은 글이 많다.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남은 지면이 적으니 《분단시대의 민족교육》(학민사, 1985)를 구해 보기를 권하면서 ‘우리의 교육지표’를 소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언은 우리 교육 현장에 참교육이 든든하게 뿌리내릴 때까지 결코 우리 교사들이 잊어서는 안 될 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지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한마디로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 한갖 꿈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바로 알고 그것을 개선할 힘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교육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 역시 이 사회에서는 우리 교육자들의 꿈에 머물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마구 누르고, 자손대대로 물려줄 강산을 돈을 위해 함부로 오염시키는 풍조가 만연한 가운데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존중하는 교육은 나날이 찾아보기 어려워 가고 있다. 무상 의무교육은 빈말에 그치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도 과밀교실과 이기적 경쟁으로 몸과 마음을 동시에 해치고 있으며 재수생 문제와 청소년 범죄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온갖 시련과 경쟁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는 진실이 외면되기가 일쑤고 소중한 인재가 번번이 희생되고 교육적 양심이 위축되는 등 안타까운 수난을 거듭하고 있다.



대학인으로서 우리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교육의 실패는 교육계 안팎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자발적 일치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인 바,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그 제정 경위 및 선포 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강조되고 있는 형태의 애국애족 교육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 날의 세계 역사 속에서 한때 흥하는 듯 하다가 망해 버린 국가주의 교육사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부국강병과 낡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찾는 것은 잘못이며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두지 않은 민족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복고주의의 도구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또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와 권력에의 순응을 조장하고 정의로운 인간과 사회를 위한 용기를 소홀히 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애국애족 교육은 진정한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실천이 결핍된 채 민주주의보다 반공만을 앞세운 나라는 다 공산주의 앞에 패배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이 땅에 인간다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는 격동하는 국내외의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슬기롭게 생각하고 용기 있게 행동할 사명을 띠고 있다. 이에 우리 교육자들은 각자가 현재 처한 위치의 차이나 기타 인생관, 교육관, 사회관의 차이를 초월하여 다음과 같은 우리의 교육지표에 합의하고 그 실천을 다짐한다.



1.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

2.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

3.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간섭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4. 3·1 정신과 4·19 정신을 충실히 계승 전파하며 겨레의 숙원인 자주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 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한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김두진 김정수 김현곤 명노근 배영남 송기숙 안진오 이방기 이석연 이홍길 홍승기《한국교육운동백서》(18쪽, 풀빛, 1990)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은 1980년대 교육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충격을 준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데, 1985년 5월 10일 교육 민주화운동의 힘찬 전진을 알리는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에서 발표한 ‘교육 민주화선언’의 한 구절처럼, “돌이켜 보건데 해방 이후 우리 교육은 전 민족의 노예화를 획책하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시류에 따라 부침한 정치권력의 편의대로 길들여진 충직한 시녀로 전락하였다.” “교육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사들의 역할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무기력한 말단 관료, 역사 속의 방관자의 위치를 탈피, 새로운 교사로서 참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한국교육운동백서》, 52쪽)는 교사들의 자각을 촉발시키는 방아쇠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sbook.co.kr/view.html?serial=741

by 온달샘 | 2008/08/20 12:15 | 교육사상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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